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찬란’이라는 시를 우연히 접한 일이 있다. 여러 시인의 시를 모아둔 시집에서였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라는 구절이 마음 깊이 맺힌 일이 있었다.

  그러다 또 우연히 이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는 시집을 발견해 구매했다. 나는 보통 시집을 1시간 내로 완독하기에, 시집의 두께가 얇기도 하여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완독하기까지 약 열흘 간의 순소요시간이 걸렸다고 체감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 시집을 아직 완독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이 책은 어려웠다. 다른 거창한 말로 겉치레하고 싶지만, 은연 중에 시라는 갈래를 가볍게 여기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이 책은 깊고 무게감 있다.

  “시를 읽는 것에 우선하여 시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다. ‘아득한 정서를 이 정도까지 집약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시인은 분명, 꽤나 연륜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나의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7년생으로, 생각보다 젊어서 또 한 번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몇 번이나 부끄러웠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시집은 전반적으로 작가가 삶에 대해 지닌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여행’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내 마음을 움직인 해당 시의 마지막 세 연이다. “집에 다녀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 이토록 마음이 어질어질한 것은 나로 인한 것인지 // 기어이는 숙제 같은 것이 있어 산다 / 아직 끝나지 않은 나는 뒤척이면서 존재한다 //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이번 년도에 휴학을 하면서 내 삶의 진정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나의 꿈은 부와 명예, 그리고 장수에 있지 않기에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찾고자 했는데, 아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서 죽음을 갈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나니, 생각을 뒤집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작가가 말하는 ‘숙제 같은 것’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숙제 같은 것’을 내 삶에 적용해보면 꿈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꿈을 찾지 못한 미약한 존재이기에, 역설적이게도 더 살아야 하지 않은가 싶었다. 내 삶은 유한하지만 나의 존재는 무한하다. 내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나의 존재는 무한한 것이다. 결국 어질어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된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건 내가 지금껏 가져온 목표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을 바란다고 떠들어왔다. “떠난다는 말도 도착한다는 말도 / 결국은 헛된 말일 것이므로 / 터미널에 가서 봄처럼 아팠다” -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작가는 차갑게 없어지기 위하여 가끔 사라진다고 말한다. 오지 않을 사람이 저녁을 앞세워 올 것 같아서 터미널에 간다고 말한다. 유독 사라지고 싶은 날들이 있다. 우울한 감정에 억눌리지 않기 위해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걷는다. 상황의 회피를 통해 감정을 떨쳐내려 애쓰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를 읽고 괜히 찔렸다. 내가 관통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평생 오지 않을, 평생 오지 못할 무언가를 기다리는 나 자신이 안쓰럽다 생각했다. 행동의 목적과 감정의 이유가 조금 잡혔다. 작가는 인간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우연히 ‘찬란’이라는 시를 접한 것, 우연히 문학박람회를 방문한 것, 우연히 이상한 생선가게를 들른 것, 우연히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는 시집을 구매한 것 - 이 모든 우연들이 모여 내 일상의 작은 부분이 되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여러 우연이 모여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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